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카르도 사모라 (문단 편집) ==== [[스페인 내전]] ==== 이 시즌이 끝나고 [[스페인 내전]]이 발발하였고, 사모라는 [[오보]]의 희생양이 되었다. 스페인 방송국 ABC에서 사모라가 공화당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낸 것이다. ~~스페인 국가대표 골키퍼 사모라 [[숨 쉰 채 발견]]~~ 다만 공화당원들에 의해 투옥된 것은 사실이었다. 그는 공화당원들에 의해 모델로 [[감옥]]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가 이끄는 [[팔랑헤]]의 선전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.[* 사모라가 [[바르셀로나]]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그의 정치적 배경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. [[엘 클라시코]]가 왜 그리 치열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안다면 사모라의 이런 정치적 견해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지만 사실 당시 인구수로 따지면 마드리드가 아닌 바르셀로나가 명실부공한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. 정치적 다수파는 중상류층 사이엔 카탈루냐 민족주의, 노동계급 사이엔 아나키스트가 다수라도 바르셀로나 출신 우파 인물들도 많은 것도 당연했다. 사모라의 소속팀을 봐도 사모라는 카탈루냐인들을 대표하는 [[FC 바르셀로나]]가 아닌 카스티야인들을 대표하는 에스파뇰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아버지도 카탈루냐 혈통이 아니었다. 어찌됐든 이런 사모라의 정치적 견해가 마음에 들었는지 프랑코는 1950년대에 사모라에게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였다.] 이런 상황이면 거의 [[사망 플래그]]급이지만 사모라는 살아남았는데 체포 당시에는 사모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이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라 그를 죽이지 못했고 그 당시 감방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서는 교도소장 멜초 로드리게스와 간수들을 축구 이야기로 구워삶았기 때문이라고... 그와 함께 축구 경기를 뛰고 축구 강습까지 받았다고 한다. 게다가 그의 체포에 스페인의 각종 언론들이 들고 일어났음은 물론이고 [[쥘 리메]] 같은 외국의 저명 인사들도 석방을 탄원했을 정도라 이것도 사모라의 사형을 막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. 나중에 [[아르헨티나]] [[대사관]]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[[프랑스]]로 건너간다. 거기에서 [[OGC 니스]]의 [[선수 겸 감독]]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[[리그 1|디비지옹 1]] 최고의 골키퍼였던 [[루돌프 하이덴]]과의 시합이 프랑스 축구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. 이후에 같이 니스에 있던 [[주젭 사미티에르]]와 함께 1938년 12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팔랑헤 군인들을 위한 자선 경기에 뛰기도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